1960년대, 가난한 변방의 나라에서 독일에 진출한 시대의 프론티어들이 있다. 파독 간호사와 파독 광부들이 그들이다. 독일에서 30년을 간호사로 살다 돌아와 남해 독일마을을 일구는데 앞서온 석숙자 명사. 평생 무에서 유를 개척해 온 그녀의 독일 그리고 독일마을 이야기를 들어본다.

코리안 엔젤이 된 파독 간호사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부부는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였다. 실제로 수많은 청춘 남녀들이 간호사와 광부가 되어 한국을 떠났다. 석숙자 명사도 그렇게 독일로 향했던 파독 간호사였다.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스무 살 때, 파독 간호사 모집 기사를 보고 바로 도전했습니다. 물론 불안하고 두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과감하게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원도 삼척 도계가 고향인 석숙자 명사는 서울로 올라와 2년간 간호사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취득한 후 독일로 떠났다. 1973년, 석숙자 명사와 5명의 동료들은 라이힐링앤(Leiclingen)이라는 작은 도시에 정착했다. 이 도시를 찾은 최초의 동양인이었다. 낯설지만 기대도 컸을 도전.

하지만 양로원에서 근무하게 된 석 명사는 말이 통하지 않아 죽음을 앞둔 중환자를 돌보거나, 시체 닦기 등 힘든 일을 도맡아야 했다. 그래도 서러움이 복받칠 때마다 ‘감사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언어는 원활해졌고, 한국인 동료들과 함께 휴가를 떠나 평소는 냄새 때문에 못 먹는 된장찌개, 김치찌개 등 한국 음식을 해 먹으며 그리움도 달랬다. 온갖 어려움을 견디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녀에게는 ‘코리안 엔젤’이라는 애칭도 붙었다.
“당시 8급 공무원 월급이 1만 5천 원이었는데 파독 간호사는 15만~20만 원씩을 받았어요. 생활비 3만~4만 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국으로 보냈지요. 대한민국의 성장에는 파독 간호사와 광부의 노력이 있었다는 걸 젊은 세대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독일마을에서 그리움 종착역을 일구다

3년 계약으로 떠났던 독일 생활이 30년이 되었다. 독일인 남편이 65세가 되면 고국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계획을 세웠을 즈음, 2001년 남해군에서 독일 교포들이 고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독일마을을 조성했다. 하지만 2002년 12월에 첫 입주자로 독일마을을 들어섰을 때는 그저 돌산에 황무지였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석 명사는 새로운 고향 만들기에 앞장섰다. 마을 대표를 맡아 2006년부터 3년간 독일어 캠프를 진행했고, 2010년에는 독일의 유명한 맥주 축제를 벤치마킹해 독일마을 옥토버페스트를 개최한 것이다. 3천 명을 예상했던 첫 축제는 만 명이 찾아 대성황을 이뤘고, 이제는 매년 외국인들을 비롯해 10만 명이 넘게 찾아오는 글로벌 축제로 성장했다.
“20대에 독일을 선택한 것도 참 잘한 선택이고 60세에 남해를 선택한 것도 참 잘한 선택이며, 이 나이에도 아직 할 일이 있다는 것 또한 참 잘한 것 같습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 중 남해가 고향인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여기가 우리의 마지막 정착지입니다.”
맥주축제 위원장, 파독전시관 해설과 마을 공동체 영농조합에서 주말마다 파독전시관 바로 옆, 영농조합에서 운영하는 부스에서 독일소시지와 독일맥주 등을 판매하며 청춘 시절 못지않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석 명사. 이제 추모공원 조성으로 그녀가 정한 마지막 사명의 화룡점정도 찍고 있다. 도전과 긍지로 독일마을을 마지막 정착지로 만들어가고 있는 석숙자 명사로 인해 우리는 남해에서 독일을 만나고 있다.

간호사와 광부가 독일로 파견되어야 했던 배경은 무엇이었나요?

1960년대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76달러였는데, 태국 220달러, 필리핀 170달러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죠. 그 시기에 우리는 외화가 부족했고 독일은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성장으로 노동력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우리 광부와 간호사를 독일로 파견하게 됐죠. 그렇게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936명의 광부들이, 1960년부터 1976년까지 1만 1,057명의 간호사들이 독일로 떠났습니다. 그때 파독 간호사가 한국의 8급 공무원 월급의 10배를 받았는데, 대부분의 금액을 한국으로 보냈죠. 그렇게 파독 간호사들이 1965년부터 1975년까지 고국에 송금한 금액은 1억 153만 달러로 대한민국 총 수출액의 10%에 해당했습니다. 당시 우리의 경제 상황에 비춰보면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의 노력은 분명 한국 경제개발에 초석이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남해독일마을3-사이즈

독일마을의 정착 과정 및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1999년에 남해군에서 독일의 큰 도시들을 돌면서 설명회를 개최했어요. 이후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보겠다는 희망으로 남해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독일마을은 주민들이 땅을 구입하고 자재도 독일에서 수입하여 전통 독일식 주택으로 직접 건립하였으며, 남해군에서는 기반시설 건립을 지원했죠. 처음에는 다섯 집으로 시작해 지금은 43가구 6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독일마을 정착 후에 주민들은 독일에서 수십 년을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독일의 문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독일어 캠프를 시작으로 옥토버페스토축제를 통해 큰 성과를 거두었고, 2014년에 파독전시관이 건립되면서 구심점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또한 마을 공동체로 영농조합을 만들어서 부스에서 독일 소시지와 독일 맥주를 팔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민들이 대부분 고령이기 때문에 앞으로 교포가 없는 마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추모공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떠난 다음에도 추모공원이 남아 우리 마을의 정체성을 지키게 될 겁니다.

독일마을이 문화 관광 콘텐츠로서 가지는 의의 및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독일마을은 파독 광부 파독 간호사의 마을이라는 점에서 문화 및 관광 콘텐츠로서 그 의의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광부와 간호사들의 고단한 삶이 어쩌면 개인적인 부분일 수도 있겠지만, 한 편으로는 독일 교민들의 역사이며 동시에 조국의 경제발전의 초석이 된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인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외국을 간다는 생각조차 못 하던 70년대에 비행기를 30시간 넘게 타고 독일로 갔고, 그 시대에 당당한 전문직 여성으로서 살았던 삶의 개척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이곳에 와서 힐링 남해를 만들기까지 그 어느 하나도 새로운 개척이 아닌 것이 없죠. 따라서 독일마을 주민들은 무에서 유를 개척한 프론티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살아있는 역사야말로 어마어마한 관광 콘텐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맥주 축제를 통해 관광 콘텐츠로서도 가치를 높였고, 이제 파독전시관이 있어서 더욱 남해를 오면 꼭 들러야 할 관광 포인트가 되었죠.

PROGRAMS

파독전시관 해설 관람
2014년 문을 연 파독전시관에는 파독 간호사들과 광부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제로 마을 주민들이 사용했던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독일에서의 힘든 생활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온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파독 광부 간호사들의 설명을 직접 들으며 전시관을 돌아볼 수 있다.
경남 남해군 삼동면 독일로 89-7
055-860-3540
09:00~18:00
독일마을 탐방
푸른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붉은색 뾰족한 지붕과 하얀 벽이 조화를 이룬 집들에서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독일마을의 연원과 현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독일 마을 관광안내소에서 하루 3번(10:30, 13: 30, 15:00) 진행하는 해설에 참여해 본다. 파독전시관 옆 독일 매점(Deutscher Imbiss)에서 독일 소시지와 맥주를 즐기는 것도 독일마을을 체험하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독일마을 맥주축제
독일마을 맥주축제는 세계 3대 축제인 독일 뮌헨의 ‘Oktoberfest’를 모태로 해마다 10월 초에 열리고 있다. 지난 2010년 시작해 전국 어느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축제로 남해 독일마을의 브랜드가 됐다. 정통 독일 맥주와 소시지 등을 즐기며 광장 가득 모인 사람들과 대규모 축제를 함께 즐기는 흥겨움, 그리고 이색적인 독일문화도 체험해볼 수 있다.

명사 추천 주변 관광지

보리암
기암괴석들로 뒤덮인 남해 금산 남쪽 봉우리에 자리한 보리암은 68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 후에 조선왕조를 열게 되었다며 감사의 뜻으로 1660년에 왕실의 원당으로 삼았다. 전국 3대 기도처 중 하나이며, 3대 관세음보살 성지로 꼽힌다. 보리암 내에 존광전, 해수관음상 등이 자리하고 있다.
경남 남해군 보리암로 665
055-862-6115
boriam.or.kr
가천 다랭이마을
45°가 넘는 경사의 비탈에 석축을 쌓아 층층이 계단처럼 쌓인 논들이 108층이 넘게 이어져 있는 다랭이마을. 척박한 환경에서도 억척스럽게 삶을 일구어 낸 선조들의 의지가 배어 있으며, 논과 산, 집들이 산허리를 따라 구불거리며 흘러내리는 풍경은 바다와 어우러져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환경부 2001년 자연생태 전국 최우수마을, 명승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경남 남해군 남면 남면로 679번길 21
055-862-3427

PROGRAMS

파독전시관 해설 관람
2014년 문을 연 파독전시관에는 파독 간호사들과 광부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제로 마을 주민들이 사용했던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독일에서의 힘든 생활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온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파독 광부 간호사들의 설명을 직접 들으며 전시관을 돌아볼 수 있다.
경남 남해군 삼동면 독일로 89-7
055-860-3540
09:00~18:00
독일마을 탐방
푸른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붉은색 뾰족한 지붕과 하얀 벽이 조화를 이룬 집들에서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독일마을의 연원과 현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독일 마을 관광안내소에서 하루 3번(10:30, 13: 30, 15:00) 진행하는 해설에 참여해 본다. 파독전시관 옆 독일 매점(Deutscher Imbiss)에서 독일 소시지와 맥주를 즐기는 것도 독일마을을 체험하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독일마을 맥주축제
독일마을 맥주축제는 세계 3대 축제인 독일 뮌헨의 ‘Oktoberfest’를 모태로 해마다 10월 초에 열리고 있다. 지난 2010년 시작해 전국 어느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축제로 남해 독일마을의 브랜드가 됐다. 정통 독일 맥주와 소시지 등을 즐기며 광장 가득 모인 사람들과 대규모 축제를 함께 즐기는 흥겨움, 그리고 이색적인 독일문화도 체험해볼 수 있다.

명사 추천 주변 관광지

보리암
기암괴석들로 뒤덮인 남해 금산 남쪽 봉우리에 자리한 보리암은 68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 후에 조선왕조를 열게 되었다며 감사의 뜻으로 1660년에 왕실의 원당으로 삼았다. 전국 3대 기도처 중 하나이며, 3대 관세음보살 성지로 꼽힌다. 보리암 내에 존광전, 해수관음상 등이 자리하고 있다.
경남 남해군 보리암로 665
055-862-6115
boriam.or.kr
가천 다랭이마을
45°가 넘는 경사의 비탈에 석축을 쌓아 층층이 계단처럼 쌓인 논들이 108층이 넘게 이어져 있는 다랭이마을. 척박한 환경에서도 억척스럽게 삶을 일구어 낸 선조들의 의지가 배어 있으며, 논과 산, 집들이 산허리를 따라 구불거리며 흘러내리는 풍경은 바다와 어우러져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환경부 2001년 자연생태 전국 최우수마을, 명승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경남 남해군 남면 남면로 679번길 21
055-862-3427
INFORMATION
독일마을 남해파독전시관
글 송지유 | 사진 남윤중(AZA Studio)
클라이언트 KTO | 디그램 (지역명사문화여행) ©dgram.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게시물에 사용한 사진의 저작권은 촬영자가 보유하고 있으며, 무단 사용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The copyright of the photo used in the posting is held by the photographer, and it is prohibited to use it without permission.

0개의 댓글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