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년 대를 이어온 섬김과 사랑의 음식

한국의 종가음식은 한 집안에서 수백 년 대를 이어온 음식을 말한다. 종가음식에는 전통과 유대를 소중히 여겨온 한 집안 사람들의 삶, 문화,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다소 화려한 면도 있었지만 자기절제를 중시하는 성리학의 시대였던 조선시대에 이르러 단아한 품격과 예의 격식을 갖춘 음식으로 자리매김했다.

수백 년 이상 이어져온 명예로운 가문의 음식

종가란 시조로부터 대대로 맏아들로만 이어져 내려오는 집을 말한다. 한국에는 1천 년 이상 유지되어 온 종가도 있으며, 4백 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오는 종가도 많다. 종가에는 명예를 존중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조선시대 선비의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사회 상류층인 종가의 음식은 집안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값비싼 재료를 사용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꾸민다는 선입관이 존재한다. 그러나 평상시 차려지는 종가음식은 정성이 담긴 소박한 음식이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실학자 이익은 잡곡밥에 된장, 고추장, 김치, 나물로 이루어진 밥상으로 생활했다. 다만, 제사를 모실 때 준비하는 제사음식의 경우에는 조상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의미를 담아 최고의 음식을 준비했다.

섬김과 사랑의 종가문화가 깃든 음식

종가음식은 예로부터 조상과 웃어른을 섬기고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예(禮)의 중요한 수단이다. 예의 중요한 의식이 바로 성년식인 관례, 혼인식인 혼례, 장례식인 상례, 추도식인 제례인데 종가음식은 관혼상제의 핵심수단이었다. 특히 제례를 치르는 제사는 종가의 가장 중요한 행사이다. 조상과 웃어른을 잊지 않고 존경하는 의식인 제사를 중심으로 공동체적인 협동이 이루어지고, 가족과 이웃이 제사음식을 함께 나눠먹는데 이를 음복, 곧 단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는 행위라 한다. 가족과 이웃에 대한 정, 곧 사랑을 표현하는데도 종가음식은 빠지지 않는다. 종가에서는 혼례가 있는 날 맏며느리에게는 잘 차려진 큰상이 차려지고, 사위의 첫 생일에도 특별한 상이 차려진다. 종가의 농사를 돕는 머슴들에게는 노고를 격려하는 특별상이 내려지기도 했다. 한편, 종가를 방문한 손님은 항상 정성이 담긴 음식을 대접받는다.

맛 이상의 품격이 담긴 종가의 술과 장

술과 장은 한국의 대표적인 발효식품으로 얼마나 정성을 쏟아 만들었느냐 따라 그 맛이 천차만별이다. 종가음식은 오랜 기간 정성으로 담그는 장을 비롯하여 김치, 술 등 슬로푸드의 전통이 잘 살아있는 곳이다. 집에서 담근 술 곧 가양주(家釀酒)는 종가에서 제사상, 손님맞이상 등을 차릴 때 꼭 올리는 것이었다. 장은 모든 음식의 맛을 내는 필수적인 양념으로 지역특산물과 종가의 제조법이 더해져 차별성을 이루었다. 오늘날 종가의 술과 장은 지역의 대표적인 음식 브랜드로 자리 잡아 시판되고 있다.(경주 교동법주, 전주 이강주, 이기남할머니전통장, 기순도전통장)

하늘이 내린 종부의 내림솜씨

선비 가문의 맏아들인 종손과 그의 부인 종부는 위로는 조상을 섬기며, 아래로는 자손과 마을 공동체를 보살피는 섬김과 사랑의 리더십으로 종가문화를 이어왔다. 종부는 일생동안 종가음식을 계승, 전수하는 주인공으로서 그들이 한결같이 지켜온 종가음식의 맛을 일컬어 내림솜씨라고 한다. 그것이 종가음식에서 음식의 맛과 영양 이상의 기품이 느껴지는 이유이다. 종가의 맏며느리인 종부는 ‘하늘이 낸다’고 할 정도로 고결한 품격과 넉넉한 덕, 탁월한 살림솜씨를 갖추었다. 이들은 향토의 제철 식재료를 조화롭게 고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정성을 다해 조리하고 종가의 격에 어울리게 상차림으로 꾸며 올리는 것까지 정성을 다해 오고 있다.

박물관장이 된 종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3대 청백리로서 불합리한 조세제도의 개혁에 앞장 선 오리(梧里) 이원익의 13대 종부, 함금자 씨는 종가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알리고자 충현박물관의 문을 열었다. 종가박물관인 이곳에서는 선비의 생활상과 함께 종가의 부엌, 종가의 제사 등 종가음식 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종가의 전통과 종부의 정성이 어우러진 종가음식

석계종가

청렴을 실천하며 후학양성에 매진했던 조선 인조 때의 선비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 1590~1674)의 집안. 340여 년 전, 그의 부인 장계향은 동아시아 최초의 여성이 쓴 조리백과서 <음식디미방>을 지었다. 현재 13대 이돈 종손, 조귀분 종부가 이 종가를 지키고 있다.

석류탕

잘 익어 살짝 벌어진 석류의 모양으로 빚어 석류탕이라 이름 지어진 일종의 만둣국이다. 얇게 지진 밀가루피에 소를 넣어 빚은 후, 따뜻한 장국을 붓는다. 감칠맛의 여운이 깊으며 그 조리법이 <음식디미방>에 전해 내려온다.

대산종가

청빈과 지조의 삶을 살았던 조선 후기의 학자 대산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집안. 이상정은 퇴계의 학통을 이어 성리학에 매진,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쳤으며 많은 후학을 길렀다. 지금은 9대 이방수 종손, 박정순 종부가 대산종가를 지키고 있다.

섭산적

쇠고기를 다져 양념한 뒤 으깬 두부를 섞고 넙적하게 만들어서 석쇠에 구운 음식이다. 동물성·식물성 단백질의 맛과 향이 담백하게 조화를 이룬다.

온계종가

너른 도량과 한결같은 충절로 존경받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 온계 이해(溫溪 李瀣, 1496~1550년)의 집안. 이해는 조선시대 대학자 퇴계 이황의 형이며,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생을 마쳤으나 사후, 정민공의 시호가 내렸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을미의병 때 소실된 종택을 복원하여, 지금은 17대 이목 종손, 류명석 종부가 지키고 있다.

무전

홍합을 삶아낸 국물에 얇게 썬 무를 넣어 잘 익히고 그 물로 반죽한 밀가루 옷을 익힌 무에 입혀 부친 전이다. 홍합살은 다져 고명으로 얹는다. 무와 홍합의 향이 조화를 이룬다.

연저육찜

돼지고기의 식감을 부드럽게 만든 담백한 찜 요리이다. 삶은 돼지고기를 팬에 구워서 약간 도톰하게 썬 다음 은행, 대추, 삼, 두부를 넣은 조림간장을 끼얹어준다.

학봉종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의 집안.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은 수제자로서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항전을 독려했다. 지금은 15대 김종길 종손, 이점숙 종부가 학봉종택을 지키고 있다.

사과정과, 인삼정과

종가의 잔칫날 빠지지 않는 정과는 한과의 일종이다. 식물의 뿌리 또는 열매를 꿀에 넣고 조려 만들며 전과(煎果)라고도 한다. 달콤하고 향기로우며 특히 그 모양이 꽃처럼 아름답다.

갈암종가

17세기 성리학을 이끈 대학자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 1627~1704년)의 집안. 이현일은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의 셋째아들로서, 영남학파를 이끌며 조선시대 유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지금은 12대 이원흥 종손과, 김호진 종부가 갈암종가를 지키고 있다.

집산적

쇠고기, 당근, 대파, 다시마, 우엉, 무 등을 꼬치에 꿰어 밀가루, 국간장, 물을 섞은 반죽을 묻혀 지진 것이다. 모듬적이라고도 하며 다채로운 재료가 들어가 풍성한 맛을 자아낸다.

송화다식, 송화밀수

송화다식은 소나무 꽃가루인 송홧가루를 조청이나 꿀로 반죽하여 다식판에 박아낸 한과이다. 색의 조화를 위해 흑임자로 만든 검정색 다식과 마에 오미자물을 입힌 붉은색 다식과 함께 낸다. 송화밀수는 송홧가루를 꿀물에 타서 잣을 띄운 음료이다. 종가의 멋과 여유가 담긴 후식이다.

동아시아 최초의 여성 조리서

음식디미방

340여 년 전 년경 석계 이시명의 부인 장계향이 후손들을 위해 지은 조리서이다.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여성이 쓴 조리서이며, 한글로 쓴 최초의 조리서이기도 하다. 술, 장 담그는 법으로부터 다양한 식재료로 만든 146가지의 음식 조리법이 소개돼 있다. 음식디미방은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라는 뜻을 지닌다. 책 말미에는 “이 책을 이리 눈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은 각각 베껴가되 이 책을 가져갈 생각일랑 마음도 먹지 말며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하여 쉽게 떨어지게 하지 말라”는 간곡한 당부의 글이 적혀 있다.

음식디미방 대표 메뉴 소개

잡채

꿩고기와 몇 가지 채소를 익혀서 골고루 담고 꿩고기 삶은 육수에 양념을 하여 걸쭉하게 만든 즙을 끼얹은 음식이다. 석이버섯(검정색)과 맨드라미 꽃 물을 들인 동아(분홍색)를 사용하여 색상을 아름답게 표현해냈다. 꿩고기는 기력 보충에 좋다.

어만두

아주 얇게 저민 생선으로 빚은 만두로, 석이버섯, 표고버섯, 꿩고기, 잣을 참기름에 볶아 만든 소가 들어있다. 석이버섯은 열을 내리고 체력을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고, 표고버섯은 소화작용을 돕는다.

대구껍질누르미

대구껍질을 벗겨내어 석이버섯, 표고버섯, 꿩고기로 만든 소를 넣고 싸서 익힌 음식이다. 대구는 간기능 강화, 피로회복, 시력증강에 좋다.

빈자법

거피한 녹두로 만든 반죽에, 팥과 꿀을 섞어 만든 소를 넣어 노릇하게 지진 전이다. 녹두는 각종 소화효소를 포함하고 있어 소화흡수가 잘된다.

수증계

삶은 닭고기 살 위에 고명으로 오이, 부추, 잔파, 달걀지단, 생강채를 올린 후 삶은 알토란을 곁들인 음식이다.

가제육

집돼지고기를 썰어 기름간장에 재워뒀다가 밀가루를 묻혀 기름장에 익힌 음식이다.

글 박현숙 작가 | 사진 이종근, 각 지역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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