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만(汝自灣) 내측에 형성된 반폐쇄형의 보성 갯벌은 우수한 자연성을 기반으로 수많은 해양 생물들이 살아가는 자연의 보고이다. 연안습지로는 국내 최초로 람사르조약에 등록될만큼 천연의 습지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보성 벌교 일대의 갯벌은 세립한 펄갯벌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수산자원과 이를 기반으로 살아가는 섬사람들의 강인한 삶이 이어져 온 삶의 터전이다.
반폐쇄형 여자만에 퇴적된 세립 펄갯벌
보성은 흔히 녹차의 고장으로 인식되어 있고, 벌교 또한 소설 <태백산맥>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곳이다. 다만 그 영향으로 벌교와 꼬막은 늘 붙어다니게 되었는데, 바로 여기에 보성 갯벌의 힌트가 담겨 있다. 바로 벌교 꼬막이 채취되는 산지가 보성 갯벌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보성 갯벌은 보성군 벌교읍 해안가의 갯벌(면적 7.5km2)과 순천만 갯벌(면적 28km2)을 지칭한다. 이중 행정구역상 보성 갯벌은 벌교읍 대포리, 장암리, 장도리, 호동리 일원이(31.85㎢) 포함돼 있다. 보성 갯벌 지역의 유네스코 자연유산 지역은 3185ha이며 이는 보성 순천 갯벌 전체 5985 헥타르의 약 53%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여수반도와 고흥반도 사이 항아리처럼 둘러싸인 여자만은 남북 길이 30km, 동서 길이 22km의 반 폐쇄성 갯벌을 가지고 있다. 보성갯벌은 이 여자만의 가장 안쪽에 형성되었다. 특히 금강에서부터 기원한 퇴적물이 해류를 타고 이동하는 긴 여정을 통해 세립화되어 최종 종착지인 여자만의 가장 안쪽에 장도를 중심으로 차곡차곡 쌓여 두꺼운 갯벌을 만들었다. 때문에 장도를 중심으로 한 보성 갯벌 지역은 자연 하천인 벌교천과 펄갯벌이 이상적으로 이어진 자연성이 매우 우수한 갯벌이다. 또한 모래갯벌은 미약하지만 다른 어느 갯벌보다 입자가 얇고 가는 펄갯벌이 퇴적되었다.
자연성이 우수한 수산자원의 보고
보성 벌교 일대의 펄 갯벌에서는 짱뚱어들과 밤게가 돌아다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곱고 미세한 펄 덕분에 작고 가벼운 짱뚱어와 밤게도 자유롭게 갯벌 속을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있다. 그러나 이들이 펄 위에 남긴 작지만 부드러운 흔적은 금새 사라질 뿐이다.
이처럼 세립한 펄갯벌로 형성된 보성 벌교 일대의 갯벌은 꼬막, 짱뚱어, 피조개, 굴, 바지락 등 다양한 수산자원의 보고이다. 또한 붉은 발 말동게, 대추귀고등 같은 보호대상 해양 생물들이 서식하는 등 높은 생물 다양성과 우수한 자연성, 지형·지질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2004년에는 동북아 두루미 보호 국제네트워크에 가입하였으며, 2006년부터 연안 습지로는 전국 최초로 람사르습지로 지정 관리돼 왔다.
이외에도 유네스코 자연유산 지역 중 가장 넓은 염습지가 발달되었다. 나문재 모새달 등 다양한 종류의 염생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그중 갈대와 칠면초가 우점종으로 자리하고 있다. 풍부한 먹이를 찾아 모여든 검은머리물떼새, 알락꼬리마도요 등 법적 보호종 철새의 서식지이며, 백로, 저어새 등이 주로 발견된다.
갯벌에 기대어 사는 섬, 장도
“우리는 갯벌 밖에 자랑할 게 없어요.”
장도 주민의 한마디가 갯벌에 기대어 사는 섬사람의 삶을 대변한다.
여자만 바다 한가운데 있는 ‘장도(獐島)’는 벌교 갯벌의 중심이다. 섬 전체가 노루발목처럼 가느다랗고 길게 뻗어 있는 형태가 노루와 닮았다 하여 노루 장(獐)자를 쓴다. 장도에는 현재 18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섬이다. 꼬막과 낙지를 중심으로 짱뚱어, 굴, 바지락 등 풍부한 해산물이 생산된다. 그 중에서도 참꼬막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다.
벌교 꼬막이 유명한만큼 전국 꼬막 생산량의 70% 가량은 벌교에서 생산된다. 그런데 그 벌교 꼬막의 80%가 바로 장도 주변에서 생산된다. 장도 주변의 펄갯벌이 꼬막이 서식하기 좋은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11월 말이면 장도에서 꼬막잡이가 시작된다. 장도 꼬막은 크게 피꼬막, 참꼬막, 새꼬막 3가지로 나뉜다. 이 중에서 가장 높이 쳐주는 건 단연 참꼬막이다. 참꼬막은 다른 꼬막보다 골이 깊고 단단한데 속살의 졸깃한 맛과 깊은 향이 다른 꼬막에 비할 바가 아니다. 벌교 사람들은 벌교 앞바다 여자만의 진흙갯벌을 ‘참뻘’이라 하고, 이곳에서 자란 참꼬막은 양질의 미생물을 먹고 자라 살이 단단하고 모래가 섞이지 않아서 가장 맛이 좋다고 평한다.
또한 피꼬막과 새꼬막은 배를 이용해서 그물로 잡아올리지만, 참꼬막은 갯벌에서 사람들이 직접 채취한다. 맛이 좋은 만큼, 품도 많이 드는 만큼 참꼬막은 같은 무게의 새꼬막에 비해 대여섯 배쯤 가격이 높다. 하루 두 번 펼쳐지는 갯벌에 섬 전체가 갇혀 버려도, 장도 주민들이 여전히 갯벌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갯벌 위를 달리는 500년 전통의 ‘뻘배어업’
장도 앞바다에 물이 빠지면서 광활한 갯벌이 드러난다. 마을 아낙들이 하나 둘 나와서 물 빠진 바다, 갯벌로 향한다. 저마다의 팔에는 길이 2m, 폭 50cm 정도의 커다란 널빤지가 하나씩 안겨 있다. 얼핏보면 서핑보드와도 닮았지만, 갯벌에서 없어서는 안될 ‘뻘배’다. 뻘배 위에 몸을 싣고 한쪽 다리로 펄을 밀며 나아가는 아낙들의 모습은 금세 갯벌의 지평선 끝으로 점이 되어 가물가물해진다. 이처럼 장도에서는 뻘배를 타고 나간 아낙네들이 광활한 갯벌에서 참꼬막을 잡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국가중요어업유산 제2호로 지정된 ‘뻘배어업’이다. 벌교 갯벌은 미사와 점토가 80% 이상을 차지하는 아주 미세한 갯벌 진흙이다. ‘두발로 들어갔다 네발로 나온다’는 말처럼 사람이 갯벌에 들어가면 몸이 깊게 빠지는 특성을 지닌다. 때문에 펄 갯벌에서 이동하고 어업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다. 바로 갯벌 위에서 이동과 채취를 수월하게 하는 ‘뻘배’다. 명칭은 지역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대체로 널, 널매, 뻘차, 뻘배, 널배 등으로 불렸다.
뻘배어업이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된 것은 약 120년 정도이지만, 널빤지를 이용해 갯벌에서 수산물을 채집하거나 이동수단으로 사용한 건 500여 년 이상의 전통어업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벌교에서는 11월부터 3월까지 꼬막 철이 되면 뻘배를 타고 갯벌을 오가며 참꼬막을 캤다. 때문에 설 명절 이후 정월 대보름까지 뻘배를 깨끗이 손질하거나 풍어를 기리는 마음으로 집안에 모셔두는 풍습이 존재했으며 각종 어류의 산란철인 5~6월에 뻘배 경주 대회를 열어 송아지를 경품으로 이용할 정도로 벌교 어업인들의 독특한 갯벌 문화로 발전했다.
자연유산 심사차 방문했던 심사단은 뻘배어업을 보고 “한국의 갯벌 신청 유산 중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공간”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