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황실은 잊힌지 오래다. 그러나 역사의 뒤안길에서 굴곡진 근대사를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황손 이석은 이 시대 황실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정신적 문화적 구심점으로서 황실의 존재 의의에 대해 환기시키는 그는 가요 ‘비둘기집’ 을 부른 가수로도 잘 알려졌다. 그가 꿈꾸는 21세기 황실의 역할에 대해 들어보자.

황가의 후손, 역사의 뒤안길에 서다

전주 한옥마을의 어느 골목, 승광재(承光齋)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한옥에 대한제국의 황손이 살고 있다. 이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현실임을 확인시켜주는 인물은 이석 황실문화재단 총재다. 망국의 황손, 이미 태생적으로 비장미를 담고 있는 영화처럼 그 삶은 파란만장했다. “아버지는 일제에 대한 울분에 못 이겨 하셨어요. 매일 죽는다 죽는다 하시고 일본 놈들 내쫓으라고 권총 쏘시고, 그러다 제가 16살 때 돌아가셨죠.”
고종황제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의친왕은 항일투쟁에 참여했던 유일한 황족이었다. 의친왕의 11번째 아들이 바로 이석 총재다. 서울 사동궁에서 태어난 이석 총재는 어렸을 때는 등하교 때도 상궁들이 쫓아다녔다. 그러나 무너진 황실은 곤궁했고, 이 총재는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DJ를 시작해 미 8군 무대와 워커힐 등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사회를 봤다. “순종 황후 윤 대비께서는 ‘황실이 망해도 황손이 광대가 되느냐’며 굉장히 노여워하셨어요. 또 갓 쓰고 나이 많은 분들이 와서 절하며 ‘왕손이 어떻게 노래 부릅니까’라며 울기도 했지요.” 1966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부상으로 귀국 후 68년에 ‘비둘기 집’ 음반을 발표하면서 비둘기집 가수로 알려졌다. 그런데 1979년 10·26 이후 살고 있던 칠궁에 헌병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하루아침에 거리로 쫓겨났고, 극심한 슬픔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잃어버린 역사의 뿌리 다시 세우기

낯선 땅 미국에서의 삶은 당연하게도 고생길이었다. 직업도 돈도 없었고 불법체류자 신세까지 됐다. 수영장 청소부터 고층 빌딩 청소, 밤에는 권총을 차고 경비원으로도 일하다 겨우 슈퍼마켓을 차렸지만, 4년 동안 여러 번의 강도를 당하고는 결국 가게를 포기해야 했다.
한국에 다시 돌아온 것은 1989년, 영친 왕비 이방자 여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였다. 하지만 고국에 돌아와도 갈 곳 없는 신세는 반복되었다. 그의 사연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전주에 내려오게 됐다. 2004년 10월에 전주시에서 제공한 승광재에 입주하며 드디어 정착하게 됐고, 전주 문화대사 역할도 맡았다.
겨우 오랜 방황을 접고 삶의 뿌리를 내린 이석 황실문화재단 총재는, 황실 문화 복원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며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가 복원하려는 것은 역사를 되돌려 옛 황실의 영화와 권위를 되찾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구심점을 없애기 위해 일제가 왜곡시키고 훼손한 우리의 역사와 문화의 뿌리, 상징적 가치를 바로 세우자는 것이다.
“올바른 역사와 황실 문화를 알리기 위해 전국을 돌며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일제에 의해 참담하게 허물어진, 잃어버린 역사의 큰 줄기를 바로 세우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고 믿습니다.”
어쩌면 그가 꿈꾸는 ‘궁’은 드라마 속에서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락으로 내몰렸던 그와 황실 사람들의 질곡의 삶 역시 우리 역사의 일부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후 황실 사람들은 어떻게 사셨던 건가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잊혔지만 황실 사람들은 1979년 10·26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궁에서 생활했습니다. 1941년에 제가 서울 사동궁(寺洞宮)에서 태어났는데, 지금은 없어졌지만 안국동 로터리에서 현재의 태화빌딩 일대가 모두 사동궁이었어요. 아버지 의친왕의 사저였죠. 사동궁에는 상궁, 나인, 청각씨 등이 함께 살았고, 가정을 이룬 형님들도 궁 내 기와집에 각각 따로 살았어요. 이후 성낙원, 별궁, 창덕궁 낙선재, 칠궁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고, 칠궁(七宮)은 청와대 내(궁정동) 사적 제149호로 지금도 남아 있어요. 그런데 이승만 정부가 황실재산관리법을 만들어 황실 재산을 국유화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구황실사무총국에서 그나마 윤 대비께 경제적 지원을 했지만 생활을 유지하기에는 어림도 없었죠. 그나마 박정희 정부 때까지는 적게나마 생활비가 나왔다고 하는데, 10·26때 그냥 거리로 쫓겨난 거죠. 그리고는 뿔뿔이 흩어져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거나 외국에 정착했죠.

대한제국 황실은 어떤 형태로 복원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실제 황실을 복원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역사와 전통, 문화적인 면만은 유지 계승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상징적인 황실을 만들어 놓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영국 왕실처럼 상징적인 어른이 있으면, 민족의 구심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페인에서 프랑코 총통이 40여 년 만에 다시 왕정을 복원했던 것도 구심점이 필요했던 거잖아요. 요즘 제 강의를 들으면 ‘이렇게 멋진 황실 역사가 있는데 왜 잊어버렸냐’라며 개탄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5천 년 역사, 적어도 500년 역사가 이어져 왔다는 살아있는 증거잖아요. 군림하는 황실이 아니라 친근하게 역사 속 인물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보여지고요. 현재 전 세계에 42개 나라에 왕이 있다고 합니다. 그 나라들과 문화교류도 할 수 있잖아요. 정신 문화적인 면에서 황실 복원은 분명한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대한제국 황실이라는 상징성이 문화 관광 콘텐츠로서 가지는 의의는 무엇일까요?

전주 한옥마을에 오는 분들은 승광재를 한 번씩은 찾아오십니다. 물론 저를 만나고 싶어서 찾아오시는 분들도 많고요. 아이들과 함께 온 부모들은 교과서에서 배운 황실 어른이라고 설명하면 아이들이 신기해하는 모습도 보곤 합니다. 이석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문화 관광 콘텐츠로서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그 이면에는 살아있는 뿌리의 상징이라는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제가 전주 한옥마을에 자리 잡기 전만 해도 1년에 관광객이 몇 십만 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천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황손이 있기에 한옥마을의 위상이 높아졌다고들 말씀해주셔서 자긍심도 적지 않습니다.

또 각계의 주요 인사들을 비롯해 주한 외국 대사들과 외교관계자들도 한옥마을에 들르면 꼭 승광재를 찾아오십니다. 이런 점에서도 황실이라는 상징적 존재로서 전주의 위상을 높이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자부하며, 어디에도 없는 의미 있는 문화 콘텐츠라고 생각합니다.

PROGRAMS

황실과 함께하는 우리 이야기

‘황실과 함께하는 우리 이야기’가 경기전에서 진행된다. 관광객과 일반 시민들에게 우리 역사를 바로 알리고, 조선 건국의 발상지인 전주의 문화와 역사, 문화재를 알리기 위한 행사이다. 격주 토요일 경기전 수문장 교대식 후인 오후 3시에 진행된다.

경기전과 어진박물관 해설 투어

전주한옥마을 입구에 위치한 경기전은 조선의 뿌리 같은 곳이다. 경내에는 국보 제317호인 이성계의 어진(왕의 초상화)을 모신 본전과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공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 등의 유적이 있다. 단체로 사전 신청 시 이석 황손이 직접 해설에 나서서 투어를 하기도 한다.

승광재 관람 및 체험

황손이 거주하는 승광재는 ‘빛(光)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대한제국 연호인 ‘광무(光武)’ 즉, 고종황제의 뜻을 이어나가는 목적을 담았다. 승광재에는 조선 왕조의 역대 왕들의 모습과 이석 황손의 활동 등을 사진으로 소개해 황실 활동을 알 수 있다. 황실 문화 체험도 즐겨볼 수 있다. 조선 역사 알기, 황실 다례 익히기, 황실 예법 익히기 등과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

유생복과 과거시험 체험

조선 시대 유생들이 입던 유생복과 망건을 입고 과거시험을 재현하기도 한다. 과거 시제는 삼행시 또는 사행시 형태의 단문. 심사를 거쳐 우수한 글을 제출한 유생에게 ‘황실문화재단’에서 제공하는 상품과 기념품이 제공된다. 단체로 신청할 때 가능하다.

명사 추천 주변 관광지

오목대

전주 한옥마을에 자리한 작은 언덕으로 이곳에 오르면 한옥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태조 이성계가 개국 전 왜적을 토벌하고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조선왕조를 개국한 후 여기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오목대(梧木臺)라 했다. 오목대에서 왕복 6차선 도로를 건너면 이목대가 나오는데,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목조 이안사가 살았던 곳이다.

  • 주소:
    •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 1-11
  • 전화:
    • 063-281-2114
전동성당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중 하나로 꼽히는 전동성당은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절충해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보여준다. 한국 천주교 첫 순교 성지로 호남지역의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곳으로 알려지며,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었다. 한옥마을 내 경기전 바로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 주소: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51
  • 전화:
    • 063-284-3222

PROGR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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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과 함께하는 우리 이야기’가 경기전에서 진행된다. 관광객과 일반 시민들에게 우리 역사를 바로 알리고, 조선 건국의 발상지인 전주의 문화와 역사, 문화재를 알리기 위한 행사이다. 격주 토요일 경기전 수문장 교대식 후인 오후 3시에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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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한옥마을 입구에 위치한 경기전은 조선의 뿌리 같은 곳이다. 경내에는 국보 제317호인 이성계의 어진(왕의 초상화)을 모신 본전과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공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 등의 유적이 있다. 단체로 사전 신청 시 이석 황손이 직접 해설에 나서서 투어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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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유생들이 입던 유생복과 망건을 입고 과거시험을 재현하기도 한다. 과거 시제는 삼행시 또는 사행시 형태의 단문. 심사를 거쳐 우수한 글을 제출한 유생에게 ‘황실문화재단’에서 제공하는 상품과 기념품이 제공된다. 단체로 신청할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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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전주 한옥마을에 자리한 작은 언덕으로 이곳에 오르면 한옥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태조 이성계가 개국 전 왜적을 토벌하고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조선왕조를 개국한 후 여기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오목대(梧木臺)라 했다. 오목대에서 왕복 6차선 도로를 건너면 이목대가 나오는데,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목조 이안사가 살았던 곳이다.

  • 주소:
    •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 1-11
  • 전화:
    • 063-281-2114
전동성당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중 하나로 꼽히는 전동성당은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절충해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보여준다. 한국 천주교 첫 순교 성지로 호남지역의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곳으로 알려지며,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었다. 한옥마을 내 경기전 바로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 주소: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51
  • 전화:
    • 063-284-3222
INFORMATION
승광재
  • 주소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최명희길 12-6
  • 전화
    • 063-284-2323
글 송지유 | 사진 남윤중(AZA Studio)
클라이언트 KTO | 디그램 (지역명사문화여행) ©dgram.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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